책 소개
《빅파파》는 이 ‘자연스러운’ 슬픔과 연민을 거부한다. 그러니 분노도 독자들의 몫이 아니다. 소설 속의 〈사람 냄새〉라는 방송 프로그램처럼 루저들의 삶을 ‘인간적’이라고 치장해 슬픔과 연민을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조작된 경기의 밖이 있는 것처럼, 방송 프로그램 속의 ‘인간적’ 삶의 외부가 있다. 그렇다고 《빅파파》는 말한다. 조작된 경기가 조작된 경기임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처럼, 사람들은 잘 편집된 방송 프로그램이 편집된 것임을 알면서도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본다. 그들은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본다. 그것이 관전자나 시청자의 안온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경기’ 안에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만은 경기 ‘밖’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빅파파》는 이 ‘밖’을 보여주기에, 눈물짓게 하기보다는 웃음 짓게 만들고 허탈하게 만든다. 눈물이 ‘공감’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의 ‘공감’을 거부한다.
작가 소개
199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장편소설 《빅파파》로 제7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Round 1 세컨드 아웃
Round 2 아빠보단 빅파파
Round 3 사람 냄새
Round 4 악연
Round 5 사우스포와 사우스포
Round 6 펀치 드렁커
Round 7 써커 펀치
Round 8 카운트다운
작가의 말
종종 담배 몇 개비를 피워도 아무런 글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온몸을 비틀고 쥐어 짜내봐도 고작 단어 하나에 막히고 마는 순간들. 반면 이 작품을 쓸 땐 쓰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글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당혹스러웠다.
아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그때 나도 가장 낮은 바닥에 웅크린 채 수음이나 하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아마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 삶에 대한 변호처럼 느껴졌기에 그럴 것이다. 아마 이건 소설이 아니라 그들과 나누는 저급한 뒷담화 내지는 한탄을 기록한 낙서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아마, 결국 쓰는 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꼭 나인 것 같고, 그래서 퍽 예쁘고 자랑스러워 어디다 내놔도 굶어 죽진 않겠다 싶다가도 데면데면해지고 밉고 쪽도 팔리고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고 또 밉고 종종 몇 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책 속에서
복싱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_p.7
‘치원 씨’라고 호칭하는 순간 경기 시작을 알리는 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내가 잠시 방심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나마 가드를 올린 채 그의 눈빛을 보며 그가 어떤 펀치를 나에게 내밀 것인지 예의 주시했다. 저 공격을 맞아야 하는지, 피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며 _p.18
조작 경기 선수였던 지난 세월 동안 비록 패자의 역할을 도맡으면서도 나는 경기에서 졌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자위의 일종일...
복싱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_p.7
‘치원 씨’라고 호칭하는 순간 경기 시작을 알리는 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내가 잠시 방심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나마 가드를 올린 채 그의 눈빛을 보며 그가 어떤 펀치를 나에게 내밀 것인지 예의 주시했다. 저 공격을 맞아야 하는지, 피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며 _p.18
조작 경기 선수였던 지난 세월 동안 비록 패자의 역할을 도맡으면서도 나는 경기에서 졌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자위의 일종일지도 모르나, 나는 항상 그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경기를 조망하며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여겼던 것이다. 내가 패배를 선택한 이상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더 커다란 손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는 자신이 인간인 줄 착각했던 꼴사나운 꼭두각시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_p.33
공기에도 모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내뱉고 간 냄새들은 공기의 움푹 들어가 있는, 가장 은밀하고도 약한 부위에 달라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_p.44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단어들에는 그 사람의 심리가 깃들어 있는 법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새끼’라는 말을 쓰고, 다른 한 명은 ‘친구’라는 말을 썼다. _p.55
내게 있어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곧 진짜라는 것들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과 다를 바 없었다. _p.90
이제 빅파파와 나는 어느새 인생의 굴곡 끝에 누구보다도 불쌍한 나락에 빠져버렸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하층민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불쌍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불쌍한지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불쌍하지 않게 되었다. _p.102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깊고 고요한 수면 위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물수제비처럼, 조용하지만 하염없이 퍼져만 가는 그 목소리를.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나 괜찮아……’ _p.148
그런데 똥개들이란 항상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짖기 마련이다. _p.156
단순함은 언제나 복잡함의 머리 위에 군림한다. 이름 붙이기 나름인 번잡한 기술들을 샌드백 앞에서 연습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상대보다 적게 맞고, 많이 때리면 되는 것뿐.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준다. 복싱이아니라 진정 촌스러운 ‘뽁싱’답게. _p.269
그런데 인생은 어떨까. 우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났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누군가가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10초일 수도, 아니면 10년일 수도 있는 깜깜한 시간들. 어쩌면 인생이란 그 깜깜한 시간들 속에서 헤매는 나날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나는, 내가 나의 카운트다운을 세기로 했다. _p.272